축구는 □다
2006 FIFA 월드컵, 중계를 이야기로 바꾸다.
2006 독일 월드컵은 한국 지상파 방송사들의 스포츠 중계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KBS, MBC, SBS가 같은 경기를 동시에 중계했고, 경기 결과만큼이나 어느 방송사를 선택하느냐가 화제가 됐습니다.
당시 저는 입사 4년차의 젊은 스포츠 PD였습니다. 하지만 그 월드컵에서 맡았던 역할은 제 연차보다 훨씬 컸습니다. MBC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전략 중 하나는 기존의 딱딱한 중계를 넘어, 경기를 더 서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포츠의 격식은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더 직관적으로 닿는 방송. 그 답을 찾는 일이 제가 맡은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스코어보다 오래 남는 이야기
형식이 곧 내용이다. 무엇을 보여주느냐만큼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표현 방식과 포맷은 같은 경기에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국제 스포츠 중계에서는 현장의 국제신호를 받아 방송하기 때문에 연출자가 경기 화면 자체를 크게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의 앞과 중간, 그리고 끝을 활용했습니다.
경기 전에는 흔한 FIFA 랭킹이나 선수 정보를 반복하기보다 각 나라의 국가 가사를 자막으로 보여줬습니다. 국가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때로는 전쟁과 정치까지 담고 있습니다. 팬들이 상대 팀을 단순한 순위와 숫자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와 이야기를 가진 팀으로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프타임 광고 중에는 그날 경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카피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은 경기 종료 직후였습니다.
휘슬이 울린 뒤의 3분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면 약 3분의 영상이 이어졌습니다. 단순한 주요 장면 모음이 아니었습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날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 테마에 맞춰 장면을 골라 실시간으로 편집했습니다. 음악을 선택하고 마지막에는 그 경기를 한 문장으로 정의했습니다.
이 포맷은 월드컵 초반부터 빠르게 주목받았습니다. 호주와 일본의 경기에서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변화하는 표정과 세리머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마지막에 ‘축구는 이 남자의 표정이다’라는 카피를 붙였습니다.
경기를 설명하는 대신 그 경기를 기억하게 만드는 장면과 문장을 찾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었습니다.
축구는 오늘... 죽었다
그리고 한국과 스위스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가 왔습니다. 한국은 0대2로 패하면서 16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특히 후반 스위스의 두 번째 골을 둘러싸고 당시에는 오프사이드 판정에 대한 거센 논란이 있었습니다.
경기 막바지까지도 최종 카피를 정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심판 판정을 직접 비판하는 문장들이 제안됐습니다.
그때 니체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신은 죽었다.’ 그래, 오늘 우리에게 축구도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조정실에서 그 문장을 처음 보여줬을 때 탄식과 감탄이 동시에 나왔습니다. 방송이 끝난 뒤 그 문장은 뉴스와 인터넷에서도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결말을 알 수 없는 라이브 스포츠를 끝까지 지켜보면서, 마지막 몇 분 사이에 경기 전체의 감정을 한 문장으로 붙잡아야 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젊은 PD에게 찾아온 전환점
2006년 월드컵에서 MBC가 거둔 성과는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차범근, 차두리, 김성주의 중계뿐 아니라 수많은 선배 PD와 제작진이 새로운 방식의 스포츠 방송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했습니다.
저 역시 그 과정에서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크게 배운 것은 익숙한 방식이라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르게 보고, 주어진 형식 안에서도 새로운 답을 찾는 습관이었습니다.
2년 뒤인 2008년, 저는 제35회 한국방송대상에서 개인상인 스포츠제작보도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경력이 길지 않은 젊은 PD였던 제게는 큰 인정이었습니다.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 제가 얻은 가장 큰 것은 시청률도, 한 줄의 카피도 아니었습니다.
MBC의 선배들과 제작진은 이미 익숙해진 스포츠 중계의 문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경기를 보여주더라도 더 이야기답게, 더 감정적으로, 그러나 스포츠가 가진 품격은 잃지 않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주어진 형식 안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경험은 이후 제가 일하는 방식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스포츠와 드라마를 만들고, 게임과 e스포츠로 옮겨가고, 경기장을 만들고, 글로벌 이벤트와 다양한 IP를 다루면서 분야는 계속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조금이라도 새롭게 만들려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2006년 스위스전이 끝나가던 밤, 저는 화면에 ‘축구는 오늘... 죽었다’라고 썼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날 죽은 것은 축구가 아니라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축구는 그날 죽었지만, 저만의 방식은 그날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