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파크와 라이엇 자체 프로덕션
LCK의 홈그라운드를 만들고 방송 제작을 내재화하다.
2018년 MBC를 떠나 Riot Games로 옮기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스포츠 PD와 드라마 PD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었고, 오랫동안 일해온 방송사를 떠나는 선택에는 꽤 긴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Riot이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는 특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언젠가는 제 손으로 경기장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꿈꿨던 것은 야구장이었지만, 이번에는 LCK를 위한 전용 경기장과 자체 방송 제작 시스템을 처음부터 설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Riot이 찾고 있던 조건은 10년 이상의 프로듀서 경험, 라이브 프로덕션 경험, 그리고 야외 이벤트나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제작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세 가지를 모두 경험해본 드문 케이스였습니다. 무엇보다 방송국과 경기장을 동시에 만든다면 내가 누구보다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LCK의 새로운 홈그라운드
당시 한국 e스포츠의 방송 역사는 OGN을 빼고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시대부터 OGN은 한국 e스포츠의 방송 문법을 만들어왔고, 당시 LCK 역시 OGN과 SPOTV가 제작과 방송을 나눠 맡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OGN의 팬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Riot이 LCK를 직접 제작하기로 한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단순히 방송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리그 운영사인 Riot이 경기 운영부터 방송 제작, 콘텐츠, 현장 팬 경험까지 직접 책임지는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LoL Park를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Arena + Broadcast Studio + Content Production Hub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작동하는 LCK의 새로운 홈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선수와 팬을 더 가깝게
팬 경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선수와 팬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일방향 무대형 경기장 대신 선수석을 관중이 둘러싸는 270도 콜로세움 형태를 선택했습니다. 양쪽에는 각 팀의 팬들이, 중앙에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관람객이 자리하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더 큰 변화는 선수 경기부스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e스포츠에서 방음부스는 경기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상식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수와 팬 사이에 물리적인 벽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팬들이 선수의 표정뿐 아니라 움직임과 긴장감, 팀원 간의 소통, 가능하다면 숨소리까지 최대한 가까이에서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물리적인 부스를 없애는 대신 음향으로 공정성을 확보했습니다. 선수에게 전달되는 외부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이중 화이트노이즈 시스템을 적용했고, 관중의 소리가 선수석으로 직접 유입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Sound Wall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물리적인 방음벽 대신 음향적으로 차단 구역을 만드는 접근이었습니다.
초기에는 팬과 업계의 우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픈형 선수석은 LCK를 상징하는 자연스러운 경기 경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경기장, 팬 경험, 프로덕션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LoL Park의 초기 공간 설계 개념을 포트폴리오용으로 단순화한 도식입니다. 상세 건축 및 운영 도면은 의도적으로 재현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경기장에 걸맞은 시스템
LoL Park는 경기장인 동시에 방송국이어야 했습니다. 자체 제작을 시작하는 이상 기존 방송 환경을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기준에서 가능한 한 앞선 제작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4K 제작 및 송출이 가능한 방송 시스템을 구축했고, 중앙 경기장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할 수 있는 장거리 레일카메라 시스템과 크레인 등 다양한 이동형 카메라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제작 동선을 설계했습니다.
무대 중심에는 경기장을 감싸는 3면 고해상도 대형 LED 스크린을 배치했고, 경기장 내부와 외부에는 20,000안시급 고광량 프로젝터를 설치했습니다. 리플레이와 AR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 장비들을 넣은 이유는 최신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LCK라는 디지털 스포츠가 가진 특성을 방송과 공간에서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게임과 경기장이 하나가 되다
제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개념 중 하나는 게임과 경기장의 실시간 연결이었습니다.
일반 스포츠에서는 경기 데이터를 얻기 위해 카메라와 각종 센서가 필요하지만, e스포츠에서는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사건이 이미 데이터로 존재합니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오브젝트가 언제 처치됐는지, 경기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API를 통해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LoL Park의 조명, LED와 사운드를 인게임 이벤트 API와 연동했습니다. 예를 들어 드래곤과 같은 주요 오브젝트가 처치되면 해당 이벤트에 맞는 LED 그래픽과 조명, 사운드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팬들의 함성을 실시간으로 측정해 그 크기에 따라 프로젝션 그래픽이 변화하는 시스템도 구상했습니다. 팬의 반응이 다시 경기장의 비주얼로 돌아오는 방식이었지만, 이 아이디어는 실제 구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스포츠의 문법을 e스포츠로
기술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선수와 제작진이 사용하는 백스테이지였습니다. 스포츠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좋은 경기장은 관중석과 경기 무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정된 공간에서도 동시에 네 팀이 머물고 연습할 수 있는 Green Room을 좋은 위치에 배치했습니다. 단순한 대기실이 아니라 선수들이 경기를 준비하고, 팀 미팅을 하고, 콘텐츠 촬영까지 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 공간들은 이후 실제로 수많은 LCK 콘텐츠의 배경이 됐습니다.
또한 전문 메이크업룸, 별도의 미니스튜디오, 선수의 입장과 인터뷰에 활용할 수 있는 Mixed Zone 등을 한정된 공간 안에 넣었습니다.
경기장 안에는 코치들이 경기를 실시간으로 관전하며 분석할 수 있는 Coach Box도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닫힌 공간으로 만들지 않고 투명한 구조를 사용해 팬들이 경기 중 코치진의 표정과 반응까지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선수와 코치가 준비하고, 기다리고, 반응하는 과정 자체도 스포츠 경험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기장을 넘어, 하나의 시스템으로
돌이켜보면 LoL Park 프로젝트는 단순히 e스포츠 경기장 하나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경기장, 방송 제작, 게임 데이터, 선수 환경과 팬 경험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계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동시에 Riot Korea가 외부 방송 제작사에 의존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직접 LCK의 방송과 콘텐츠를 책임지는 조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저 개인에게도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배운 라이브 스포츠의 문법, 드라마와 엔터테인먼트 제작 경험, 대형 이벤트 운영 경험을 처음으로 게임이라는 새로운 산업에 옮겨놓는 일이었습니다.
어릴 때 꿈꿨던 야구장을 직접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제가 사랑하게 된 또 하나의 스포츠를 위한 경기장을 만들었습니다.